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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학교에 제출해야 할 자기소개서 및 간증문입니다.
청소년기, 매 학기의 수련회 등을 거치며 기도에 대해서, 교회 생활에 대해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제자입니까>,<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같은 책을 읽으며 어린 나이에 고민도 해봤던 것 같다.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주우며 예수님께 칭찬 얻으려 애썼던 것도 같다. 수련회 때면 으레 목 놓아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나면 은혜 받았다는 경험들이 쌓인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알아간다기 보다는 교회의 지식과 종교생활에 대해 익혀 가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분이 나의 구원의 문제에 관계하신 분 인줄을 알았다. 문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정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인 것은 교육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내 삶의 구주로 맞아 드리진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그리고 군대에서의 시간동안 내 안에 계속 된 고민은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었다. 좋은 집,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잘 사는가보다.’라고 하지만 잘 사는 것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면 한 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 것인지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은 무엇일까? 한 편 이 고민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 이유는 특별하게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자신은 있었지만, 남들과 다른 의미 있게 삶을 살기에는 세상의 벽이 너무나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 고민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 나갈 때 처음으로 말씀은 내게 진리를 알게 해주었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볼 때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스스로를 메뚜기 같이 보았다.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모습을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진술했다. 그런데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여겼다.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이들은 상반된 진술을 보였다. 이 차이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두려워 할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을 두려워 할 것인가, 에 대한 문제였다. 모두가 두려워 떠는 이 열방이, 하나님에게는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사40:15),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땅을 발판 삼으신(사66:1)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은 넘치는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그 때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님은 신실하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아무 꿈이 없었다. 도무지 꿈이 없었다. 학창시절 수련회 때마다 강사 목사님들의 공통된 질문이 하나 있었다. 구체적인 비전이 없는 사람은 손들어 표시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쭈뻣쭈뻣 하며 손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도 나는 늘 손을 들었고 결국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한 지 이 십여 년이 흘렀지만 과거 그 자리에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강사 목사님들이 말하는 질문의 답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제 딸 가진 가정의 가장인데도 말이다. 수련회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신 구체적인 비전은 없지만 내게 비전이 하나 있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나는 지금 사진을 찍고 있다. 작가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내 비전이 아니다. 내 비전은 하나님이다. 내 소망은 하나님이다. 사진이 아니어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는 것이 내 비전이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특별한 비전이 없던 내게 도피성과 같았다.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색약이라는 판정 때문에 탈락하고, 원치 않은 대학의 국제통상학과로 진학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나름대로 인턴쉽으로 회사에 나가 일도 했다. 그러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참 많은 가치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돈과 명예, 좋은 대학과 같은 가치들만을 주목했다. 나는 기도했다. 이런 드러난 가치들이 아니라 더 많은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을 고용하게 해주세요. 이 오랜 기도를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과 때를 따라 이루셨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국제통상학을 전공하고, 색약의 눈을 가진 내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는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기초로 나는 작업하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그 분을 내 구주로 인정한 후,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인 내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런 주님을 나는 너무나 만나고 싶었고, 마치 사도요한처럼 난 그 분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을 주님께 한 것과 똑같이 가치매김 하시겠다는 그 말씀을 품고 -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누군가를 사진 찍으면 그것이 곧 주님을 찍는 것과 같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그 과정의 선물로써 몇 권의 책들도 출간하게 되었다. 내가 기도했던 것처럼 막연하게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을 고용하는 사업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과 함께 살아가며 삶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들을 사진과 글을 통해 나누게 된 것이다. 8년 전쯤, 내가 하던 일은 종일 걷고, 사람을 만나 그들의 모습을 담는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사람들을 만났다. 마치 외로움마저도 그 치열한 시간 속에 녹아들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몇 년이 흘러, 누군가 내게 메일을 보냈다. 자신은 상업사진을 전공했는데 나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삶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질문에 보낸 답은, 자신이 상업사진을 전공했으면 상업사진을 찍으라는 것이다. 대신 당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라는 것이다. 작업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 내 작업의 기초는 앞서 말한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 곧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수고했다. 작업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명절도 반납해가며 치열하게 시간을 벌어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의 기초를 쌓아주었다.) 하지만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이 일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은 자아성취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성취는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 치열한 작업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찍고 있는 사진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소원했다. 정말 그것을 원하고, 또 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알게 하셨다. 사진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깨닫게 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툴(tool)과 틀(form)로써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신다. 다니던 교회를 떠나 혼자 살게 된 10년여 시간동안에야 겨우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해 체험적으로 믿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 시대의 고대 근동 지방, 팔레스타인과 그 곳의 문화들은 이방신과 그 제사들에 물들어 있었다. 아브라함의 아비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 아브라함도 자라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적어도 아브라함이 그 영향에서 떠나길 원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조차 사람이 인식할 범위로 자신을 드러내셨고 충분한 시간 이후에야 자신을 '여호와'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내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내하시며 다가오셨다. 내가 인식할 만큼만 다가오셨다. 그 분의 전부를 내게 나타냈을 때 나는 과연 그 분의 얼마를 인식할 수 있을까.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은 자신에게서 미래를 찾지 못하는 절망감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도 같다. 도무지 내게서 나의 꿈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발로에서 겨우 하나님의 작은 빛을 쫓아 다가갔고, 잡힐 듯, 잡힐 듯, 다가가면 하나님은 나를 조금 더 오라시며 부르셨다. 마치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부르는 아비처럼.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겨우 아버지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 수준인 것이다. 그러면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현상유지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당신의 기쁘신 일을 하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같다. 아버지가 내게 자신을 알게 하신 그 오랜 시간처럼 나도 사람들에게 그 인내함을 품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는데.. 내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주시는 이를 바라볼 때 어찌 마라톤의 고됨과 비할 수 있을까. 내 안에 계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의존은 이렇듯 창조적인 길로 출범하는 안정된 닻과 강력한 바람 모두를 제공해 주게 되었다. 긴 작업의 도중,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극악한 죄인인지를 보게 하셨다.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엄청난 간격을 알게 하시어 보혈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무게를 차지하는 것인지도 알게 하셨다. 시편 32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나는 이 말이 얼마나 복된지를 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자신은 알지만 그 내면 속 더러움을 잘 알지 못한다. 사람의 깊은 내면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내 모든 허물을 주님께서 가려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땅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죄가 가리어 진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몇 년 전인가? 버스 안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죄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참, 당돌한 기도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나님은 다음 날 알게 하셨다. 그 날 하루, 눈물로 바닥을 쓸고 다녔던 것 같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라고 불렀던 찬양가사를 차마 부끄러워 입으로 꺼내지를 못해서 웅웅거리며 울기만 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있는 더러움을 하나만 꺼내어도 내 영혼은 몸을 가누지도, 숨 쉬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서야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볼 수 있게 된다. 주님의 보혈이 없으면 나는 하루를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이 두 사람을 비유하며 말씀하셨다. 죄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자이다.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은 죄인을 구하러 왔다. 나는 너무나 큰 죄인이고, 나는 너무나 큰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진리인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은 늘 동일한 사랑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상대적인 사랑이다. 곧, 수혜자의 자기인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스스로 의로운 자는 그 보혈의 값이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죄인이다. 그것을 성령님이 알게 하셨을 때 보혈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자백하게 하셨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을 때 보혈의 공로가 어떤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죄에 대한 고민과 그를 통한 성화를 관찰할 때,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또한 죄와 은혜가 얼마나 모순되게 공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죄 때문에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바른 형상이 일그러져 버렸다는 것이 말살되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들어선 이 길이 완전한 성화를 말하는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단편적인 회심은 시사점이 될 수 있고, 감동의 포인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 또한 받는 존재라, 감정의 어떠함에 따라 탁월한, 또는 대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특히 청년의 때에 그것에 지배를 많이 받게 된다. 나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작업을 다루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는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옛적, 생각했던 구원의 모양 보다 더 수고스러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열정은 감동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열정으로 치자면 청년들을 이길 수 없다. 열정이 빠진 청년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다. 청년은 그 뜨거운 열정으로 하늘 끝까지 풍선을 타고 올라야 한다. 때론 이리 저리 부는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치우쳐 보기도 하지만 풍선이 결국 하늘을 향할 때 어떠한 모양이든 그들의 진정성이 담겨 있고 그것은 감동을 나눈다. 하지만 신앙의 완성은 젊은 때의 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위해, 신앙을 위해, 꿈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작은 유혹과 상처와 관계 때문에 신념이나 믿음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이가 들면, 책임져야 할 짐들이 늘어난다. 청년의 때, 열정을 마음껏 표출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단신의 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그림자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이 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집과 틀 또한 자라나는 것이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청년의 때,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던 것처럼, 나의 가는 길을 다 간 후에도 똑같이 주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나의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생애를 걸쳐, 나의 그림자까지 덮고 있는 그 분의 간섭하심을 맛볼 수 있다면.. 아내와는 작년에 결혼했다. 아내는 사진작업을 하다가 만난 여자다. 시각장애인이셨고, 목사님이셨던 장인어른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로 인한 여러 어려운 환경들 때문에 아내는 참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맑은 미소를 가진 여인이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딸을 두게 되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천막에 거하든, 궁궐에 거하든 상관없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가장으로써 경제적인 것에 부담도 생겼다. 하지만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의 원리처럼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온전히 드려질 때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먹이실 것을 믿는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고,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어야겠다. 백석신대원 입학은 스스로에게도 갑작스러웠다. 평소 조직과 제도권 안에 들기를 싫어했던 내게 하나님은 신대원 시험 몇 주 전에 강권하셨고 나는 거기에 순종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신대원 공부를 시작한 지 아직 얼마가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왜 내게 이 공부를 강권하셨는지 아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통해 나는 사람들을, 삶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실하게 배워나갈 것이다. 사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다. 다만 앞으로의 시간도, 지난 세월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시간에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스텝을 말씀하실 때, 순종하며 밟아나갈 것을 기도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나의 삶을 살아야한다. 내가 걷지 못한 길을 다른 이에게 ‘걸어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지도를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말씀을 따라 걸어낸 길을 적어도 내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다. 내 짧은 삶을 통해 진정 고백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말하라면, “하나님은 관념적이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에 얼마나 깊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시며 실재하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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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셉이 이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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