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한 과제를 준비하며 책을 읽다가 몇 가지를 나눕니다.
누구나 남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기도 방식을 찾아야 한다.
생활방식이 달라지면 기도 생활도 바뀌게 마련이다.
기도 생활은 다양할 수 있다.
피해야 할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면 기도를 그만두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 뿐이다.
똑같이 실제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나는 물론이고 뒤에 남겨두고 온 세상을 모조리 변화시킬 힘이 거기에 있다.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면 내면세계를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외부세계가 침투해서 장악하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뜻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인간의 세계로 초청하는 동시에 속사람을 거룩한 세계로 들여보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주님의 소중한 시간과 관심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기도를 수집해서 연구하더라도 ‘제대로 기도하는’공식을 추출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조건 말고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기도 원칙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사람마다 성품과 외모, 훈련의 깊이, 약점, 교회나 하나님과 더불어 지내온 이력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로베르타 본디는 말한다. “기도하고 있다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형편 없어 보이는 기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눈에는 제일 훌륭한 간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경건한 느낌이 매우 적고 대단히 내키지 않아 하면서 드리는 기도 말이다.
이런 기도들은 거의 모든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며 불평했다.
유다는 바로 그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그리스도께 부어서 돈을 ‘낭비’해버렸다고 투덜댔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보다 다른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눈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그처럼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이 없을 것이다.
- 기도 / 필립얀시
추가해서 같은 맥락으로 더 이야기 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드려라.' 는 것이다.
한동안 마음이 아팠을 때, 이사야 66장 1-2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
조금 비약하자면,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돌아보시기에
내 이 아픈 마음을 사람에게 쏟거나, 혼자서 낙담하는 게 아니라
내 가진 상한 심령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리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드릴 것 없지만, 이 상황과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삶과 기도를 분리하는 게 아니라,
삶이 기도고, 삶이 예배가 되는것.
그것을 정말로 꿈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기도하는 시간이 따로 필요하다.)
기도는 마치 풍선에 매달린 끈과 같아서 끈을 잘라버리면
더 높이 날아오를것 같지만 풍선이 터져버리는 것 과 같다.
아버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나는 걸어다니며, 씻거나, 요리하면서도 계속해서 기도했다.
내 삶이 예배가 되기를 그렇게 구했던 것 같다.
하나님, 이 기도를 쓰세요.
하나님이 가장 하시고 싶은 곳에 이 기도를 쓰세요.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후배가 내게 물었다.
“형의 골방은 어딘가요?”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의 신부인데, 신랑과의 밀애를 나눌 장소가 없었구나,
아내와 끊임없이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지만, 또한 둘 만의 밀애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상이야기를 나눌 때는 친구나 동료로써도 가능하지만 밀애는 부부사이에만 통할 수 있는 사귐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과 내가 그런 사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를 잇는 시간과 장소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밀애의 시간으로 가지는 것이다.